초가을 벼가 익어 갈 무렵, 온몸이 새빨간 잠자리들이 논과 들의 하늘을 뒤덮는다. 그 모습을 보면 누구나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물속 애벌레에서 하늘의 사냥 명수로 다시 태어나는 고추잠자리의 한살이와, 잠자리채를 들고 뛰던 유년의 기억을 함께 들여다본다.
초가을, 들녘의 벼가 노랗게 익어 갈 무렵이면 한국의 하늘에는 어김없이 붉은 손님들이 찾아온다. 맑고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온몸이 새빨간 잠자리들이 무리를 지어 유유히 날아다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아 이제 정말 가을이 왔구나 하고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바로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가을의 전령, 고추잠자리다.
가을을 알리는 붉은 전령
고추잠자리가 특별한 이유는 그 등장 시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잠자리들은 들판의 곡식이 무르익는 초가을 무렵, 논과 들 위의 하늘을 가득 뒤덮을 만큼 한꺼번에 나타난다. 그래서 예로부터 한국 사람들에게 고추잠자리는 단순한 곤충을 넘어,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는 자연의 달력이자 정겨운 계절의 신호로 여겨져 왔다.
고추잠자리라는 이름은 그 새빨간 몸 색깔이 마치 잘 익은 고추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머리끝부터 꼬리까지 온몸이 이렇게 붉게 물드는 것은 다 자란 수컷뿐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흔히 고추잠자리로 착각하는 고추좀잠자리는 배 부분만 붉은 경우가 많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둘이 서로 다른 종임을 알 수 있다.
물에서 시작되는 삶

화려하게 하늘을 나는 모습과 달리, 잠자리의 삶은 사실 물속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잠자리는 번데기 단계를 거치지 않는 불완전변태 곤충으로, 일생의 대부분을 물속에서 애벌레의 모습으로 보낸다. 흔히 학배기라고 불리는 이 잠자리 애벌레는 결코 얌전한 존재가 아니어서, 물속에서 작은 곤충은 물론이고 어린 물고기까지 잡아먹는 제법 사나운 사냥꾼이다.
물속에서 충분히 자란 애벌레는 마침내 큰 변신을 준비한다. 물가의 풀줄기나 나뭇가지를 타고 물 밖으로 기어 나온 뒤, 등이 갈라지면서 그 속에서 날개를 가진 성충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물속을 헤엄치던 생명이 하늘을 나는 잠자리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가장 극적인 변화의 한 장면이라 할 만하다.
산으로 갔다 들로 돌아오는 여정
성충이 된 잠자리의 삶에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여행이 숨어 있다. 대체로 초여름에 물에서 날아오른 잠자리들은 곧바로 들판에 머무는 대신, 시원한 높은 산지로 옮겨 가 그곳에서 몸을 키우며 무더운 여름을 난다. 그러다 더위가 한풀 꺾이고 가을이 다가오면, 다시 낮은 들과 논으로 무리 지어 돌아와 우리 눈앞에 그 붉은 모습을 활짝 드러내는 것이다.
가을에 들녘으로 돌아온 잠자리들은 짝짓기를 하고, 논이나 연못의 물가에 알을 낳으며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한 마리가 낳는 알은 수백에서 천 개에 이를 만큼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물속에 자리 잡은 알들은 추운 겨울을 그대로 견뎌 낸 뒤, 이듬해 봄이 되면 다시 부화하여 물속 애벌레로서 새로운 한살이를 처음부터 시작하게 된다.
하늘의 사냥 명수
잠자리는 곤충의 세계에서 손꼽히는 비행의 명수이기도 하다. 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가 하면, 순식간에 좌우로 방향을 틀거나 심지어 뒤로도 날 수 있어서, 그 능력은 다른 곤충들이 쉽게 따라오지 못한다. 게다가 머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겹눈 덕분에 거의 모든 방향을 한눈에 살필 수 있어, 노리던 사냥감을 놓치는 일이 좀처럼 없다.
이 뛰어난 사냥 실력은 사람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잠자리는 모기나 각다귀처럼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작은 벌레들을 즐겨 잡아먹는, 참으로 고마운 천연 방제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잠자리가 많이 모여드는 곳은 대개 그만큼 물이 맑고 환경이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해서, 잠자리는 자연의 상태를 알려 주는 살아 있는 지표로도 여겨진다.
잠자리채와 유년의 기억
고추잠자리는 호랑나비와 더불어, 오랫동안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곤충 가운데 하나로 사랑받아 왔다. 가을이면 잠자리채를 들고 마당과 들판을 뛰어다니며 잠자리를 쫓던 기억은, 많은 이들에게 아련한 유년 시절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실제로 마당 위를 나는 고추잠자리를 노래한 동요가 있을 만큼, 이 작은 곤충은 우리 정서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예전만큼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고추잠자리 떼를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농약의 사용과 논과 습지의 감소, 그리고 기후변화 같은 여러 요인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잠자리들이 알을 낳고 애벌레가 자랄 수 있는 깨끗한 물가가 자꾸만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그토록 흔하게 보던 풍경이 조금씩 우리 곁에서 멀어져 가는 셈이다.
붉은 가을 하늘을 지키려면
그러니 올가을, 들길을 걷다가 문득 머리 위로 붉은 잠자리들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눈에 담아 보면 어떨까. 그 작은 붉은 점 하나하나에는 우리의 어린 시절 추억과, 여전히 건강하게 살아 숨 쉬는 들녘의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가을의 선물인 셈이다.
이 붉은 가을 하늘을 오래도록 지켜 나가는 길은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잠자리가 알을 낳고 자라나는 논과 연못, 그리고 맑은 물가를 소중히 여기고, 지나친 농약 사용을 조금씩 줄여 나가는 작은 노력이면 충분하다. 그런 배려가 차곡차곡 쌓일 때, 다음 세대의 아이들도 우리처럼 고추잠자리 가득한 가을 하늘을 마음껏 올려다보며 자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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